물가 이야기에서 가장 자주 미끄러지는 지점은 지수와 등락률의 구분이다. 소비자물가지수는 지금 120.05 이다. 2020년을 100으로 놓았을 때의 값이다. 이 숫자가 말하는 것은 수준이지 속도가 아니다.

두 개의 곡선

상승률이 낮아진다는 말은 지수 곡선의 기울기가 완만해진다는 뜻이다. 곡선 자체가 내려간다는 뜻이 아니다. 기울기가 0이 되어야 겨우 수준이 유지되고, 수준이 내려가려면 기울기가 음수가 되어야 한다. 후자는 물가 안정이 아니라 디플레이션이라고 부르는 다른 사건이다.

지수는 내려온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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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물가지수 총지수, 2020=100
소비자물가지수 총지수 (원계열, 2020=100) · 원계열 ·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ECOS) · 2026년 8월 기준
※ Y축이 0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물가가 잡혔다"는 발표와 "장 보기가 여전히 무섭다"는 체감은 둘 다 옳다. 앞의 문장은 기울기를, 뒤의 문장은 높이를 말한다. 통계가 체감을 못 따라간다는 통상의 불평은, 실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축을 보며 이야기하고 있다는 신호에 가깝다.

기준연도가 조용히 하는 일

지수에는 기준연도가 있다. 2020=100 이라는 표기는 장식이 아니라 계산의 전제다. 기준연도가 개편되면 같은 물가 현실이 다른 숫자로 표현된다. 지수의 절대값을 시계열 밖으로 들고 나가 다른 통계와 비교할 수 없는 이유다.

  • 지수의 값 자체는 다른 나라·다른 통계와 비교할 수 없다
  • 비교할 수 있는 것은 같은 지수 안에서의 변화뿐이다
  • 기준연도가 바뀌면 과거 값도 함께 다시 계산된다

이 사이트가 지표마다 기준연도를 이름에 붙여 두는 것은 그 때문이다. 각주에 숨겨 두면 언젠가 반드시 빠뜨린다.

정책금리는 수준을 되돌리지 않는다

기준금리는 지금 3연% 이다. 통화정책이 겨냥하는 것은 상승률이지 수준이 아니다. 한 번 올라간 물가 수준을 정책이 되돌리는 일은 목표에 들어 있지 않고, 되돌리려 시도한 사례도 드물다.

물가 목표는 곡선을 내리는 약속이 아니라 기울기를 붙잡아 두겠다는 약속이다.

이 구분을 놓치면 정책 평가가 통째로 어긋난다. 상승률이 목표 부근으로 돌아왔는데도 체감이 나아지지 않는 상황은, 정책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정책이 애초에 약속하지 않은 것을 기대한 결과다.

무엇을 함께 봐야 하나

수준과 속도를 같은 화면에 놓는 것이 출발점이다. 지수 곡선을 길게 보고, 그 위에 정책금리의 계단을 겹쳐 보면 두 축이 언제 갈라졌는지가 눈에 들어온다. 갈라진 구간의 길이가 곧 체감과 발표 사이의 거리다.

이 글의 수치는 모두 발표 기관의 원자료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개정되면 이 문장의 숫자도 함께 바뀐다.